COLUMNIST

혼자 살았어도 외롭지 않았네 13

"석달밖에 살지 못할 것같습니다."

저녁나절이었다. 밖에서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간암이 확실합니다' 나는 의사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두려운 눈초리로 의사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고 병실 벽에 기대어 서있던 아내는 밀려드는 충격과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초가을 해가 서산으로 지고 있는지 빗속을 뚫고 햇살이 무지개처럼 창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다. 병원에 입원한지 꼭 일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주제에 어쩌자고 붉은 포도주 한 병을 통째로 들이키고 병원을 찾아왔는지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갑자기 바늘 끝으로 가슴을 수없이 찍어대는 것같은 통증을 느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몇 차례에 걸쳐 피를 뽑아가고 소변 검사를 하고 흉부와 위장 사진을 수없이 찍어댔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탓일까. 담당의사가 방사선 시험을 제의해왔다. 어차피 간암이라고 판정된 바에야 나를 의학 실험대상으로라도 써먹어 보려는 수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손으로 배를 쓰다듬는다거나 쑥으로 뜸질을 한다거나 하는 한방 치료에는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으나 이상한 물질을 몸속에 집어넣어 검사한다는 것은 소름 끼치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아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고집을 피울 때가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이튿날 아침 창문조차 커튼으로 가려진 밀폐된 방에서 방사선 물질이 가느다란 주사바늘을 통해 내 몸속으로 서서히 퍼져들기 시작하면서 나는 비로소 아내의 마지막 기대조차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왔다.

오후 늦게야 담당 의사가 병실을 찾아왔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다. 캘리포니아와 브린마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미국 성당에 열심히 나가고 있었다.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서툰 영어로 고해성사까지 가끔 바쳤으며 가족을 이끌고 영성체를 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갑자기 사람들을 만나는 것조차 무서워졌다. 내가 약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기가 싫었던 셈이다. 나가던 성당에도 발걸음을 끊어버렸다.

가끔 섣달 그믐의 차가운 달빛을 바라보며 겨울에는 왜 꽃이 피지 않는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으며 오뉴월 뙤약볕에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여름에는 왜 함박눈이 쏟아지지 않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었다.

하늘이 주제하는 자연의 질서에까지 반기들기를 좋아하던 나는 끝내는 '강물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떠내려간다'는 억지에 이르러서는 나의 사회조직에 대한 반발이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음을 알게 됐다.

이후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아내의 울음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상한 버릇이 처음에는 아내를 의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분명히 석달 정도는 더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나보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것같은 추측 때문에 밤잠을 설쳐가면서 아내의 전화소리에 귀를 기우리는 이상한 짓을 거듭하고 있었다.

톨스토이이 소설 '아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itch)을 나는 연상하고 있었다.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는 한이 있어도 숨길 수밖에 없는 아내의 애절한연민'(A patronizing contempt as misguided affection)이 떠올랐다.

그같은 순수한 배필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병'을 알지 못한 채 살려고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주인공을 연상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견기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나는 며칠동안 빈 방속에 갇혀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나의 죽음에 관하여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나를 빼돌리기 시작했으며 자기네들끼리 수군거리는 횟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가끔 서울에 있는 아내의 가족들로부터 밤늦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벽에다 귀를 바짝 대는 버릇은 계속되었다. 아내는 훌쩍이며 내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죽는가보다. 갑자기 외로움과 두려움이 온몸으로 엄습해왔다. 아내도 불쌍하게 여겨졌다.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아내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해 갖가지 있을 수 있는 일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직도 아내가 내곁에 앉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인간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나의 영혼을 쓰다듬어줄 가장 가까운 이가 옆방에서 잠자고 있다는 사실(A promise of spiritual companionship near the end)은 적어도 내가 죽을 시간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이 세상을 하직할 수 있다는 확실성이 뚜렷해지면서 나는 이상하리 만큼 정신적인 안정감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아내야 말로 '확실한 손'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추호의 의심도 갖지 않았다. 내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는 나의 손을 잡고 있을 것이며 내가 숨을 거둔 후에도 두 눈을 쓰다듬어 조용히 잠들게 할 것이며 관 뚜껑이 닫힌 후에는 한 송이 장미꽃과 흙 한줌을 뿌려줄 것이 확실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간암으로 쓰러져간다는 것이 결코 '쓸만한 죽음'이 못된다는 사실에 대해 어쩔 수 없는 단서를 달고 싶어졌다.

석달의 시한이 가까워지면서 나는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한 인간에게는 생명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지만 자연법칙의 입장에서 살펴 보면 반드시 필요불가결의 과정(A necessary end of process)이라는 사실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유서를 작성한다거나 묏자리를 정한다거나 하는 일을 쉽사리 마무리 지을 수가 없었다. 두달째 밤잠을 설치고 끼니 거르기가 계속됐다.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내는 끝까지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마지막 두 주일을 남겨두고 우리는 거세게 한바탕 부부사움을 벌였다. 나는 고향에다 뼈를 묻고 싶다고 아내에게 말했다. 죽는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어릴 적 자랐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의 유희였을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어떤 예술적 의미(The art of dying)를 부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한줌의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갈 적에는 어릴 때 뛰어놀던 뒷동산에 내 뼈를 묻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는 나를 비겁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죽을 때도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다고 질책했다. 여태껏 방황하며 돌아다닌 사람을 뒤쫒아 다닌 것도 힘겨운 일이었다는 표정이었다.

"제사라도 지내줄 여인이 기다리고 있는가 보죠?"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위해 어거지를 쓰는 아내의 한마디가 가슴깊이 경종을 울리듯 들려왔다. "살아야 겠다"는 욕망이 불현듯 생겨났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뒤늦게 하나님께 매달리는 가냘픈 인간으로 변해있었다.

"몇년만 더 살 수 있다면. 더욱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몇 년만 더 살 수 있게 하느님께서 죽음을 연장해주신다면"이라는 바램이었다.

마지막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신경 안정제를 처방해드리겠습니다"

병원 창밖을 향해 돌아서 있던 아내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아직 마흔도 넘지 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당연히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상태였다. 삶의 종말을 맞아 스스로 돌아보는 반성(Reflection on life's final chapter)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였다.

인간이 죽음에 대한 선택권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How to die)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있어야 할 것아닌가? 그런 여유조차 사치처럼 여겨졌다.

사람은 어차피 죽는 법이니까 그때까지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가지라며 의사가 처방해준 신경 안정제를 복용했다. 벨리움은 묘한 약이었다. 마약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아스피린을 먹는 기분으로 억지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나 이내 신경안정제가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하루라도 먹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마약환자가 된 셈이었다. 부엌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아내의 울음소리가 잦아지면서 신경안정제를 찾는 속도도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끔 까닭없이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약 기운이 몸둥아리 곳곳에 서서히 번져가기 시작할 무렵 나는 내가 간암환자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억지를 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암이라는 단어보다는 결핵이라는 단어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어설프게 자라온 문학소년 시절부터 나에게는 '가난한 삶', '슬픈 사랑', '야윈 고독' 따위의 친근한 단어들 때문에 결핵환자로 죽어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해 별난 연민의 정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죽는다면 결핵같은 병으로 죽고 싶었다.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같이 말이다.

삶의 서러움이 낙엽처럼 소리없이 떨어지는 어느 가을날, 야윈 가슴에 애틋한 사랑을 안은 채 마지막 잎사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는 그런 죽음을 갖고 싶었다. 때로는 구역질이 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지는 병든 사회를 살아가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해버린 어른이 되었지만 나는 '뚱뚱한 삶', '헛갈리는 관계', '썩어빠진 가치'같은 어색한 단어들 때문에 암환자가 되어 죽어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에 대해 분노와 증오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암이란 나에게는 부패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렇게도 싫어하던 소설속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인체에 번져가는 암세포란 사실 사회조직을 파괴하는 이상체질(Cancer is , in every possible sense a non-conformist to destroy the community of cells that has given it life)이다. 말하자면 내가 가지고 있는 반사회적인 체질이 암이라는 형태로 변한 셈이다. 인체조직의 법칙을 무시한 채 한없이 번져가는 암세포란 또한 ‘반사회성을 지닌 비도덕적 이물질(Cancer is immoral-a cluster of malignant cell in a disorganized autonomous mob of maladjusted adolescents)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의 리듬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암에 걸리고도 남을 만큼 조직 파괴를 겨냥한 못된 짓들을 밥먹듯이 반복해온 것이 사실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석달의 시한이 지났는데도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아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아내가 수소문 끝에 세계에서도 가장 귄위있다는 메이요(Mayo)병원에 입원 절차를 밟았다. 미네소타주의 겨울은 비교적 일찍 찾아왔다. 눈으로 하얗게 덮인 로체스터(Rochester) 비행장 트랩을 내려서면서 나는 시골 냄새를 맡았다. 아마도 이곳이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고향땅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살아서 시카고로 돌아갈 수 없을 것같은 두려움이 앞섰다.

나흘 동안에 걸친 정밀검사가 끝이 났다. "간암이 아닙니다" 의사가 단호한 어조로 자신있게 말했다. "멀쩡합니다" 이것을 두고 신의 장난이라고 하는 것일까? 죽었다 살아난 셈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만 추측하건데 상당히 오랫동안 감기약 타이레놀을 복용하신데다 술과 커피와 약을 한꺼번에 드셨기 때문에 간장 기능이 일시적인 장애를 준 것같기도 합니다" 간단한 의사의 설명이었다. 아내가 한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고국에 묻힐 필요가 없게 되었네요" 아내가 웃고 있었다.

인간이 죽음을 앞두고 생각하게 되는 것들은 마치 한 오라기의 실낱도 걸치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서게된 벌거벗은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진실은 죽음 앞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법이다. 아내는 가끔 남편의 답답한 삶의 얕은 속내를 짚어내면서도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무서운 곳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산꼭대기로부터 흘러내려오는 계곡의 물소리도 차츰 줄어들게 마련인데......" 아마도 가짜로 죽어가는 남편 곁에서 그많은 고뇌의 밤을 지새우면서 얻은 결론인 것같았다.

"사람이 조용하게 살수는 없을까?" 아내는 나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하늘은 가끔 자비를 베푸는지도 모른다.

곧 죽어야 할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를 내린다. 그러다가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형선고를 연기시키기도 한다. 아마도 남에게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에게는 그 죄를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두고 사람들은 많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욕망이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루한 과정인데 ‘암이라는 사형선고를 받고서야 제자리에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기가 지친 모습이었다. 오늘 따라 아내가 깊은 바다처럼 느껴졌다.

오랜만에 그가 나를 원망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느냐?"는 추궁이었다.

엉터리 간암 선고 사건은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날 서울에서 시카고로 찾아온 친구와 함께 붉은 포도주 2병을 바닥낸 후에 일어났다. 갑자기 가슴에 수백개의 침이 꽂힌 듯 참을 수 없는 통증이 계속되었다. 서울에서 온 친구는 마치 내가 심장마비라도 일으킬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곧 구급차를 불러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아마도 간암인 것같은데 석달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그때 받았던 것이다.

나를 살려준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났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는 귀띔조차 하지 않았느냐"고 섭섭해하던 박석희 주교도 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더힘든 인고의 세월을 거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내 친구 박석희였다.

그가 1990년 1월 어느 추운 날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했을 때 은퇴를 결심한 전임자는 불란서 출신 주교였었다. 가난하면서도 겸손하게 살겠다며 운전사까지 마다하고 손수 운전하던 듀퐁 주교의 삶의 모습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안동교구 산하 50곳이 넘는 성당을 찾아다니며 견진성사를 주기위해서는 산수가 수려하기로도 이름나 있지만 운전하기 힘든 산 비탈길을 자주 다녀야 했다. 그는 어느날 운전 도중 산밑으로 굴러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다.

그가 나한테 보낸 편지 가운데 "누가 교통사고를 당하면 회복하는데 약 10년이 걸린다고 하더라"는 구절은 자신이 겪어야 했던 하느님의 시련이었다는 표현을 피하고 싶었던 것같다.

나는 사실 의사의 오진으로 호들갑을 떨었던데 비해 그는 혼자서 험악한 산길을 운전하다 갈비뼈까지 부러졌음에도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는 주왕산 산책길 단풍잎이 아름답게 물든 곳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을 보람있게 살기로 결정한 사람에게는 "내가 아프면 어떻게 하나"(Fear of illness)라는 질문은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같다.

<이태영>게재된 글은 필자의 허락없이는 무단 복제나 전재를 금합니다.

May 30, 2015, 9:3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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