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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았어도 외롭지 않았네 17. 사랑한다는 말의 어려움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경우에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

한평생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부 사이에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첫째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내뱉으면 절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셋째 '사랑한다' 말을 한 후에도 그말과 반대되는 어떤 행동을 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친구간에 주고받는 말 가운데 '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1995년 7월12일

한국에서 시카고로 배달된 편지의 겉봉을 뜯으면서 나는 손이 떨렸다. 어쩌면 돈과는 상관없는 신부님의 편지가 아니랄까봐 아주 얇은 한지같은 종이에 정성드려 쓴 편지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쉰 다섯이 될 때까지 한번도 해보지 못했던 연애편지 같은 것이었다.

"친애하는 이태영 형

항상 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깨어질까봐 그것을 본인에게는 알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여태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수없이 얘기했고 그럴 때마다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을 준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라고 얼버무려 버리고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깨어질까봐 그것을 본인에게는 알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여태 살아왔습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일까?

반드시 두 사람이 세상사람들이 흔히 오해하기 쉬운 동성애를 하는 사이도 아닌데 왜 나한테까지 알리지 못했다는 말인가?

그리고 또 '그토록 아름다운 추억을 준 친구가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나만의 비밀이라고 얼버무려 버리고 살아왔습니다'라는 말은 또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가까스로 큰 숨을 쉬어가며 연애편지를 처음 받아본 사람처럼 내 조그만 몸을 숨길 곳을 찾고 있었다.

뒤뜰로 나갔다. 큰 나무의 그림자탓일까. 나의 뛰는 가슴을 다둑거리듯 스치는 바람소리가 잠시나마 짧은 안정을 가져다 주는 듯했다.

"내 옆에는 형이 보내주신 교황님의 책 'Crossing the ihreshold of hope'가 펼쳐져 있고 형의 반가운 필체를 보기전까지도 이 책을 읽으면서 형에게 편지를 써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편지 한 장이라도 보내면 우리의 비밀이 누설되고 깨어지기나 하듯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살아오는 것은 형의 우정에 대한 지나친 신뢰 탓이랄까. 그래요 신뢰를 하다보면 확인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는가 봅니다"

아니 이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일까?

편지 한 장이라도 보내면 우리의 비밀이 누설되고 깨어지기나 하듯 마음 속에 담아두고 살아오는 것은 형의 우정에 대한 지나친 신뢰 탓이랄까. 그래요 신뢰를 하다보면 확인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어지는가 봅니다.

그러니까 내가 친구의 편지를 이곳저곳 쓸데없이 돌아다니면서 자랑이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비록 죄를 많이 짓고 살고 있지만 천주교 주교로 봉사하는 훌륭한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 자신의 잘못을 호도하려 애쓴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가끔 나의 사랑하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그렇게 하고 이렇게 변명합니다. 모두 나의 변명입니다 그러면서도 변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도 한마디만 어색한 말을 해도 금방 얼굴에 보조개가 생기고 술취한 사람처럼 빨개지는 사람이지만 그는 가끔 사랑하는 하느님과 예수님께도 사랑한다는 말을 꺼려한다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자는 것인가.

나는 그가 직접 써내려간 편지를 읽어가면서 차츰 다음 구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에세이도 잘 읽고 가끔 강론때 써먹었습니다. 특히 교육에 관한 것은 여러번 사용하였으며 형의 지적 소유권을 남용하였습니다"

아니 이건 말도 안돼.

도대체 다함께 신부가 되어 한 평생을 남을 위한 삶을 살자고 먼저 친구를 유혹한 다음 본인은 살아가기에 필요한 학문들-법학이라든가 언론학, 금융공학에 이르기까지 물질문명에 물들어 지친 나머지 꼭 무슨 타령이나 하듯이 긁어모은 글 나부랭이들을 안동교구 주교님께서 일요일마다 견진성사를 주실 때 신자들에게 들여주는 강론에 인용하신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찍이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학위 따기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울바나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뿐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금기라고 믿었던 신학과 철학의 다리를 놓아준 성 아퀴나스의 이론을 탐구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마피아의 도시 시카고에 살면서 두 아이들을 기르기 위하여 남의 돈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친구가 쓴 잡문들을 강론에 인용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안부 편지가 아니라 한자씩 정성들여 써내려간 그의 편지를 읽어가면서 차음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말 그토록 오랜 세월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살면서 나도 차츰 그를 닮아가는 것일까.

곧이어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내려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나는 사실 친구 사이에 산울림이라는 것이 그렇게 멀면서도 가깝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산이란 사실 외로운 곳이다. 그 외로움을 안은 계곡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은 어쩌면 혼자서 외로운 목소리를 전달한다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산울림이 반향을 보내올 때마다 나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흠칫 놀라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평야뿐인 시카고를 떠나 혹시나 산울림의 반향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는 허망한 기대속에 위스컨신에 자리잡은 홀리 힐 언덕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을 들릴 때마다 마치 침묵의 깊은 계곡속에 묻혀있는 반향하는 가슴처럼 닥아왔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떨어져 살았지만 두 사람이 속해있는 세계란 결국 가끔 큰소리를 지르면 돌아오는 산울림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오랜만에 보내온 연서같은 편지를 읽어가면서 나는 마치 나폴레온 힐이 쓴 6가지 두려움을 떠올리게 된 것은 어떤 영문이었을까.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한번씩은 겪게 되는 6가지 두려움을 지혜롭게 이겨내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기본요소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꼭 피해야 할 3가지 방법은 첫째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엉거주춤함, 그리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 마지막으로 두려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석희 주교는 내가 받은 가톨릭 영세명 아구스딩의 삶이 예견하고 있듯이 아마도 나도 이 6가지 두려움 때문에 더많은 죄를 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나로 하여금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으로 이같은 편지를 보내온 것같았다.

첫째 그는 내가 가난해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어쩌면 동떨어진 것인지도 모를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식을 키워보지 못한 사람은 부모가 될 수 없는데 나는 많은 신자부모들의 부모로 존경받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은 항상 미지의 세계인가 봅니다. 형의 삶은 이제 무르익었고 넘치는 듯하여 좋습니다"

그는 둘째로 내가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사회적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인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칭송을 해왔다.

"솔직한 삶에 대한 고백이 곧 시이고 시의 언를 구사하는 사람은 말의 세계를 이해한 사람 곧 말씀을 이해한 사람입니다. 시적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하느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강론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보내주었던 시카고에서 발행되고 있던 신문에 실린 잡문 가운데 남이 쓴 구절을 인용한 부분을 끌어내어 '말의 세계를 이해한 사람은 곧 말씀을 이해한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남들이 뭐라 말하든 내 친구만은 나를 믿는다는 확신을 준 셈이다.

셋째로 병이 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서는 내가 1982년에 주검과 삶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석달밖에 살지 못합니다"라는 글을 빗대어 그토록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서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자기에게 연락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도 벗어난 사람인 것같다며 용기를 붇돋아 준 셈이다.

"죽음과 암. 그토록 고생을 하였으면서도 나에겐 알리지 않은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넷째로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버릴 두려움에 대해서도 나는 이미 그같은 고비를 다 벗어난 것같다며 오히려 "맏이가 대학원에 다니고 막내가 12살이니 형의 삶은 폭이 넓어 좋습니다"

그기로 다섯 번째로 내가 아내를 잃어버린 후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데 대해 내가 그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죄의식의 족쇄라도 풀어놓듯 그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안동교구 주교 착좌식이 끝난 후 그곳에 함께 참석하셨던 김수환 추기경께 소개를 할 때 "시카고에서 온 이 친구가 나를 장가 못가게 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이 친구는 두 번째 장가를 갈지도 모른다며 좌중을 웃겼다.

그러던 그가 혼자서 사는 것은 자신만으로 족하므로 날더러 또다시 장가를 들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항상 기도하고 있습니다. 혼자 사는 것은 나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여섯 번째, 그러면서도 그는 멀잖아 닥아올지도 모를 죽음을 예견했던 것일까. 어느날 갑자기 시카고로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편지를 끝맺었다.

"어느날 갑자기 시카고로 비행할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계획속에 계획이 없는 삶입니다. Rushmore에는 팩스를 보내겠습니다. 서로 시간이 맞으면 대단한 사건이 될 것이고 안맞아도 기쁜 나날일 것입니다"

그후로 내가 두 번 한국에 나가 그를 만났으며 그도 한번 시카고로 날아와서 해후의 시간을 즐겼다.

"친구가 찾아 볼테니 한국에 나오시는 길에는 꼭 전화 주십시오. 석희 드림"

나는 그가 이 편지를 보낸 후 5년이 지난 어느 가을날 낙엽을 따라 이 세상을 떠나 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었다.

그는 두려움을 벗어던진채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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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9, 2015, 8:0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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