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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았어도 외롭지 않았네 18. 친구 박석희 주교의 소천

"박석희 주교님

지난 7월1일에는 작은 아이의 생일을 맞아 시카고에서 두 시간 가량 떨어진 위스컨신주의 통나무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왔습니다"

박 주교의 편지를 받은 후 나의 독백같은 고백은 그렇게 서두를 꺼냈다.

"아이들에게는 차마 그 얘기를 꺼내지 못했지만 커다란 연못가에 자리잡은 통나무집에서 아이를 재워놓고 밤 열두시 가까운 시각에 잔디밭으로 혼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독백같은 또 고백같은 편지를 쓰려면 아무래도 혼자있는 시간이 좋을 것같아서였다.

그때 위스컨신 통나무집 주변에는 다른 여느 해변가의 미국 도시들이 그러하듯 미 독립기념일 축제를 맞아 물위로 폭죽이 터져 올랐ㅇ며 가끔 그 불꽃 사이로 반딧불이들이 어두운 밤하늘 속으로 날아 다녔다.

"달 빛과 바람과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다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만 주교님께서 생각하시듯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의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같아 글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도 박석희 주교처럼 신부가 되었다면 아마도 달빛과 바람과 이슬만 먹고 살 수 있는, 어쩌면 '세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 아니 그보다고 '세상에 물들었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수가 있었을까?

"제가 미친 듯 글을 쓰면서도 이 세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애틋하게 간직하고 싶은 삶의 한 부분이 있다면 형과 함께 보냈던 값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나 스스로도 박석희 주교는 친구면서도 연인같았던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마음의 여정을 옮겨가고 있었다.

"요즘에 와서야 글을 통해서나마 삶의 그늘진 부분을 정리하고 싶은 용기도 나의 가장 아끼는 친구 박석희 주교가 곁에 있어줄 것이라는 확신때문 인 것같습니다"

아무리 나 자신의 바램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친구와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던져버린 죄인의 몸으로 그가 끝까지 내곁에 있어줄 것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같은 변명이야 말로 행동으로써 증명하지 못한채 말이나 글로써 자신의 잘못을 미화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도 기나긴 세월을 삶 자체로 아름답게 승화시켜오신 주교님의 어려웠던 고난에 비하면 참으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고 다듬어야 한다고 다짐해 본답니다" 나는 이제 말을 끊어야 할지 모른다.

"꽃이 지는 아침에는 울고 싶어라라고 읊었던 조지훈 시인의 이야기도 시골에서 형과 함께 보낸 계절이 없었다면 쓸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이제는 보다 더 솔직해져야 할 것같다. 나의 부끄러운 편지는 다음과 같이 계속되고 있었다.

"머나먼 미국 땅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영혼만큼은 깨끗하게 의존하고 싶어 애를 태우는 까닭도 어쩌면 박석희 주교님께서 제 곁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함께 있어주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봅니다"

"가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나서 그렇게 모진 삶을 살아오면서도 어떻게 그런 순수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느냐고 물어올때면 나는 그저 조용하게 웃으며 '시골사람'이라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나 보다도 더욱 시골스러운 사람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감히 박 주교님의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도 있겠지만 이미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순수하다는 것과 주교님께서 생각하시는 순수의 개념 사이에서 억지로 다리를 놓아 순수하신 주교님을 끌어내리고 싶지 않은 욕심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신문에 쓰고 있는 글이 다 쓰여지면 나의 생각도 많이 다듬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에게 매달리고 싶어졌다.

"내가 마지막 글을 쓸 때까지 내 자신이 좀더 솔직해질 수 있도록 주교님께서 기구해주십시오. 제 삶에 대하여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하여 좀더 솔직해진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친구곁으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 일테니까요"

나의 편지는 끝내 그에게 '(존경의 의미로서) 사랑한다'는 고백을 털어놓지 못한채 그렇게 끝을 맺었다.

그토록 죄많은 친구곁에 남아있음으로써 내 자신이 좀더 그와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램도 그가 안동 교구의 주교로 취임한지 꼭 열 번째 되던 해 사라져 버렸다.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것은 환갑이 되던 해였다. 왜 하느님께서느 한평생 남을 위해서만 살았던 사람을 일찍 데려가시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나같은 사람은 아직도 살게 내버려 두실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세상 삶이 참으로 아이로니컬하다고 느껴지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누가 먼저 죽을 것인가를 알아맞히는 결정적 요인이 반드시 그 사람의 지은 죄의 무게와 그 사람이 받아야 할 용서의 질량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내가 미국 친구 세명과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던 '누가 먼저 죽을 것인가를 맞추는 모임'에 소속되었던 사람들의 주검 순서도 따지고 보면 그 가운데 가장 선량했던 사람이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그같은 삶과 주검의 본보기로 따지고 보면 누구보다고 먼저 세상을 떠났어야 할 나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하느님께서는 죄를 짓는 경우에 그것을 갚을 수 있는 이른바 '영혼의 구원'의 기회를 주는 것일까?

누가 이 세상을 일찍 떠나고 누가 이 세상에 오래도록 살고 있는지에 관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가톨릭 신부들은 아주 엄격한 수도생활과 자기희생 때문에 보통 사람들보다 수명이 짧다는 결론이었다.

대체로 58세가 평균 수명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한국 가톨릭 의대 조규상 명예교수와 예방의학교실의 이원철 교수가 1913~2003, 90년간 세상을 떠난 서울교구 신부들의 평균 사망연령을 조사한 결과였다.

물론 1910년대부터 한국 동란이 있었던 1950년까지는 열악한 경제환경 때문에 일반인들의 평균 수명도 지금과는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58세라는 나이는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 주교도 결국 평균수명을 살다가 갔다는 결론이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내가 자주 의문을 품는 사실은 인간의 수명과 욕망의 절제 사이를 오가는 좁은 길목(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에 나오는 가설)에서의 위험부담의 숨막히는 순간들이 그로하여금 일찍 세상을 떠나게 만든 까닭이 아닐까하고 나름대로 추측해본다.

그렇다 사람이 반드시 오래산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실패와 성공을 번갈아가면서 연륜이 쌓이고 경험을 늘려갈수록 보람찬 일들을 하는 사람들도 없는 것이 아닐까.

미국에서 가장 믿을 만하다는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시 소재 메이요 병원(Mayo Clinic)을 설립한 메이요 형제도 일흔이 넘어서 비영리단체로 바꿔 모든 사람들에게 의술의 혜택을 골고루 돌아가도록 애썼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착륙한 인공위성에 탑승했던 존 글렌(John Glen)도 나이가 일흔이 넘어 우주선 승선에 재도전했으며 영화배우였던 로널드 레이건도 일흔이 넘어 대통령에 두 번째로 도전했었다.

가장 커다란 의문은 사람이 일찍 세상을 떠나든 아니면 나이가 들 때까지 살아가는 내가 무엇이 되었느냐 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가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을 깨우쳐 주었던 사람이 나이 겨우 환갑에 세상을 떠난 내 친구 박석희 주교였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추측했던 것처럼 고달픈 삶때문은 아닌 것같았다.

그가 가을 단풍이 짙은 주왕산 산행길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것 그리고 그의 얼굴이 그렇게 평화스러울 수가 없었다는 것 또한 3,000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사실들은 그가 어려운 수도자의 길을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으며 또 앞으로도 살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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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2, 2015, 8:51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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